나의 이야기 신우식(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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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기춘 작성일10-01-03 13:07 조회2,692회 댓글0건본문
세월이 유수와 같다더니 벌써 머리에는 흰 눈이 내린 듯 백발이 되었구나.
인간이 일생을 사노라면 높은 산 깊은 골을 지나 요단강 건너 영원한 하늘에 살게 되겠지? 나에게는 두 가지의 한(恨)이 있고, 세 가지의 하고 싶은 일이 있다.
한은 삶 자체가 안고 있고, 그럼에도 희망을 안고 삶을 헤쳐나가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 625동란 당시에 태어난 세대일수록 동란이라는 크나큰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안고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는가 한다.
첫째로는 우선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필자는 1949년에 태어나 625동란으로 폐허가 된 국토, 516군사혁명, 부마사태 등을 겪으며 민주주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수많은 데모 등 사회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정권은 정권대로 힘들었겠으나, 국민들은 보리고개를 넘기느라 배고프고 서럽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암울한 시대를 살아왔다.
필자 역시 경남 산청 지리산 아래 두메산골에 농군의 자식으로 태어나 먹고 살기가 힘들어 부모님따라 무작정 서울로 이사온 것이었다.
천호동 허허벌판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아버지는 막노동, 어머니는 채소장사를 하면서 자식들을 가르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생계유지가 재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공부에는 관심을 가질 형편이 되지 못했다.
초등학교 다닐때는 점심은 미국에서 원조한 우유죽이나 강냉이죽을 먹었고, 기성회비는 가끔 밀리면서 내고 졸업을 하였다.
중학교는 고등공민학교 과정에서 서울시 교육청시행 검정고시 1180번 합격하였다.
점심에는 쌀이 없어 도시락을 가져가지 못하는 날에는 영어 1000단어장과 물 한병을 들고 학교 뒷산에 올라가 배고프면 물마시고 단어외우다 졸리면 잠을 자고 견디기 힘든 고통의 날들이었다.
배고픈 사정은 배고파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며 식사 중에 쌀 한톨 주어진 반찬하나 남기지 않고 물을 밥그릇에 부어 개끗이 닦아 다 먹고는 잘 먹었다고 소리를 친다.
한끼 잘 먹은 것이 하나님께 감사하지요!
신문배달 3년 하면서 고통은 있었으나 학비에 보탬이 되어 즐거웠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신문배달 후 학교로 뛰어가면 지각을 할 때가 많았다.
예전에는 왜 그리 추었는지 손과 발에 동상이 걸려 연필을 제대로 잡지 못해 글씨는 엉망이었다. 밤에는 몸이 가려워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게 남는 것은 신문 배달을 하고 받은 월급을 어머니께 맡겨놓았다. 학비를 내기 위해서 맡겨놓은 돈을 달라고 졸랐으나 장사하다 밑졌다는 핑계로 돈을 주지 않아 학비를 내지 못해 수 없이 교무실로 불러가야 했다.
담임선생님께서 학비가져 올 때까지 학교오지 말라는 말씀에 어머니께 돈 달라고
조르던 중에 '너 쫓아낸다'고 도끼를 들고 쫓아오기에 도망다니다가 마루밑에 숨었는데, 도끼를 나에게 던져 하마터면 맞을 뻔 하기도 했다.
그 이후 우체국통장을 개설하여 1원이 생겨도 저금하였다.
그래도 교회는 열심히 다녔다.
돈이 없어 헌금할 형편이 못될 때는 헌금위원이 되어 몸으로 봉사하였다.
그때 학생들이 매미채들고 봉사하는 것을 싫어했다.
당시 안창건 부목사님은 나의 모든 사정을 아셨는지 무척 아끼고 사랑과 기도로써 인도해 주셨다. 40년이 흐른 지금도 만나면 반가워한다.
고등학교 과정은 한양공고 1차 지망 기계과에 불합격하고 2차 지망 화학과에 합격하였으나 등록금이 없어 입학을 포기할수 밖에 없었다.
천막교회에서 가마니를 뒤집어 쓰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하나님 나의 갈 길을 인도하여 주소서!"
며칠동안 간절히 기도하던 중 중학교 교장선생님께서 오토바이를 타고 오셔서
'상업고등학교 야간부에 입합수속을 하였으니 아무리 어려워도 열심히 공부하라'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얼마나 고마운지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교장선생님께서는 나에게는 상업적인 재능이 있지 공업적은 재능이 약하기 때문에 상업으로 성공하라고 가르쳐주셨다.
또한 친구이신 유명학 치과의사 선생님께 낮에는 일을 시키고 책임지고 학비를 지원하라는 후원자까지 배려해 주셨지요.
대학교는 신흥보건전문대학을 다니다가 학비조달과 생계유지가 어려워 군에 입대하였다. 가난속에 가장 큰 한은 당시 부자였던 사촌형집의 멸시와 천대였다.
백부의 상속을 단독으로 물려받아 큰 부자였으나, 그의 행위는 술만 먹으면 형제들과
우리집에 와서 우리 부처와도 같은 아버지의 따귀를 때리고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마루에 연탄불을 피워 마루가 탄 적도 있다.
우리 삼형제가 큰집에(상속받아 큰 부자가 됨) 할아버지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큰집에 들어서려니까, 형수는 제사 지내려 한 명만 오지 다 온다고 야단을 치니까 동생들은 울면서 집에 돌아갔다.
군대 생활하는 동안 아버지께서 하나님이 부르셔서 천국으로 가셨다.
제대 후 우리 집에서는 만나면 싸우는 제사가 싫어 기독교식 추모예배를 드렸다.
나는 결심했다. 너희들이 훗날에 나에게 부탁하러 올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때는 반드시 불쌍한 너희를 도와주리라.
세월이 흘러 그 자녀들이 보험들어 달라면 보험들어주고 취직시켜달라면 취직시켜
주고 돈 빌려달라면 돈을 빌려주었다.
단, 돈 문제는 빌려주고 갚지 않으면 다시 빌려주지 않았다.
이와 같은 고통속에서도 종이 한 장 1원짜리 하나도 아끼고, 저축하고 열심히 생계를 꾸려나가고 재산을 축적하게되었다.
주위사람들은 나를 평가하기를 이마에 바늘을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나올 놈이라고 하였다.
경제사정은 여의치 않았지만 나름대로 결식아동돕기, 소년소녀가장돕기와 장학금지원에 최선을 다하였다.
지금도 아이들이 굶주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필자의 소신이다.
두 번째 한은 대학졸업장이 없는 것이었다.
나의 진로에 가장 걸림돌이 대학졸업장이었다.
책임있는 일을 맡으려면 꼭 대학졸업장을 요구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괴로움과 특히 신씨대종회 사무장을 뽑는 데도 대학졸업장이 없어 종친회 일을 못한 서러움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 한을 극복하기 위해서 한양대학교 평생교육원 경영과84학점과 신흥보건대학10학점, 건국대학교 사회복지과 42학점을 취득하여 한양대학교 경영학사로 내년에 졸업할 예정이다.
하고 싶은 일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현재 토끼농장 2천평 대지 위에 노인요양원을 세워 노년에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싶다.
둘째는 70세 칠순잔치 겸 자서전 출판기념회를 신축예정인 잠실 롯데빌딩 제일 높은 120층 스카이라운지에서 사랑하는 친지와 필자를 많이 도와주신 분들을 모시고 싶다.
자서전 내용은 필자의 삶을 반성하고, 후세에 교훈이 되는 정치, 경제, 문화 편으로
기록하여 남기고 싶다.
셋째는 끝이 보이지 않는 목장에 토끼와 사슴을 기르며 백마를 타고 한 없이 달리고 싶다.
두서없이 나의 삶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뒤돌아보고 희망의 메시지를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다.
인간이 일생을 사노라면 높은 산 깊은 골을 지나 요단강 건너 영원한 하늘에 살게 되겠지? 나에게는 두 가지의 한(恨)이 있고, 세 가지의 하고 싶은 일이 있다.
한은 삶 자체가 안고 있고, 그럼에도 희망을 안고 삶을 헤쳐나가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 625동란 당시에 태어난 세대일수록 동란이라는 크나큰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안고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는가 한다.
첫째로는 우선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필자는 1949년에 태어나 625동란으로 폐허가 된 국토, 516군사혁명, 부마사태 등을 겪으며 민주주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수많은 데모 등 사회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정권은 정권대로 힘들었겠으나, 국민들은 보리고개를 넘기느라 배고프고 서럽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암울한 시대를 살아왔다.
필자 역시 경남 산청 지리산 아래 두메산골에 농군의 자식으로 태어나 먹고 살기가 힘들어 부모님따라 무작정 서울로 이사온 것이었다.
천호동 허허벌판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아버지는 막노동, 어머니는 채소장사를 하면서 자식들을 가르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생계유지가 재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공부에는 관심을 가질 형편이 되지 못했다.
초등학교 다닐때는 점심은 미국에서 원조한 우유죽이나 강냉이죽을 먹었고, 기성회비는 가끔 밀리면서 내고 졸업을 하였다.
중학교는 고등공민학교 과정에서 서울시 교육청시행 검정고시 1180번 합격하였다.
점심에는 쌀이 없어 도시락을 가져가지 못하는 날에는 영어 1000단어장과 물 한병을 들고 학교 뒷산에 올라가 배고프면 물마시고 단어외우다 졸리면 잠을 자고 견디기 힘든 고통의 날들이었다.
배고픈 사정은 배고파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며 식사 중에 쌀 한톨 주어진 반찬하나 남기지 않고 물을 밥그릇에 부어 개끗이 닦아 다 먹고는 잘 먹었다고 소리를 친다.
한끼 잘 먹은 것이 하나님께 감사하지요!
신문배달 3년 하면서 고통은 있었으나 학비에 보탬이 되어 즐거웠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신문배달 후 학교로 뛰어가면 지각을 할 때가 많았다.
예전에는 왜 그리 추었는지 손과 발에 동상이 걸려 연필을 제대로 잡지 못해 글씨는 엉망이었다. 밤에는 몸이 가려워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게 남는 것은 신문 배달을 하고 받은 월급을 어머니께 맡겨놓았다. 학비를 내기 위해서 맡겨놓은 돈을 달라고 졸랐으나 장사하다 밑졌다는 핑계로 돈을 주지 않아 학비를 내지 못해 수 없이 교무실로 불러가야 했다.
담임선생님께서 학비가져 올 때까지 학교오지 말라는 말씀에 어머니께 돈 달라고
조르던 중에 '너 쫓아낸다'고 도끼를 들고 쫓아오기에 도망다니다가 마루밑에 숨었는데, 도끼를 나에게 던져 하마터면 맞을 뻔 하기도 했다.
그 이후 우체국통장을 개설하여 1원이 생겨도 저금하였다.
그래도 교회는 열심히 다녔다.
돈이 없어 헌금할 형편이 못될 때는 헌금위원이 되어 몸으로 봉사하였다.
그때 학생들이 매미채들고 봉사하는 것을 싫어했다.
당시 안창건 부목사님은 나의 모든 사정을 아셨는지 무척 아끼고 사랑과 기도로써 인도해 주셨다. 40년이 흐른 지금도 만나면 반가워한다.
고등학교 과정은 한양공고 1차 지망 기계과에 불합격하고 2차 지망 화학과에 합격하였으나 등록금이 없어 입학을 포기할수 밖에 없었다.
천막교회에서 가마니를 뒤집어 쓰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하나님 나의 갈 길을 인도하여 주소서!"
며칠동안 간절히 기도하던 중 중학교 교장선생님께서 오토바이를 타고 오셔서
'상업고등학교 야간부에 입합수속을 하였으니 아무리 어려워도 열심히 공부하라'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얼마나 고마운지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교장선생님께서는 나에게는 상업적인 재능이 있지 공업적은 재능이 약하기 때문에 상업으로 성공하라고 가르쳐주셨다.
또한 친구이신 유명학 치과의사 선생님께 낮에는 일을 시키고 책임지고 학비를 지원하라는 후원자까지 배려해 주셨지요.
대학교는 신흥보건전문대학을 다니다가 학비조달과 생계유지가 어려워 군에 입대하였다. 가난속에 가장 큰 한은 당시 부자였던 사촌형집의 멸시와 천대였다.
백부의 상속을 단독으로 물려받아 큰 부자였으나, 그의 행위는 술만 먹으면 형제들과
우리집에 와서 우리 부처와도 같은 아버지의 따귀를 때리고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마루에 연탄불을 피워 마루가 탄 적도 있다.
우리 삼형제가 큰집에(상속받아 큰 부자가 됨) 할아버지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큰집에 들어서려니까, 형수는 제사 지내려 한 명만 오지 다 온다고 야단을 치니까 동생들은 울면서 집에 돌아갔다.
군대 생활하는 동안 아버지께서 하나님이 부르셔서 천국으로 가셨다.
제대 후 우리 집에서는 만나면 싸우는 제사가 싫어 기독교식 추모예배를 드렸다.
나는 결심했다. 너희들이 훗날에 나에게 부탁하러 올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때는 반드시 불쌍한 너희를 도와주리라.
세월이 흘러 그 자녀들이 보험들어 달라면 보험들어주고 취직시켜달라면 취직시켜
주고 돈 빌려달라면 돈을 빌려주었다.
단, 돈 문제는 빌려주고 갚지 않으면 다시 빌려주지 않았다.
이와 같은 고통속에서도 종이 한 장 1원짜리 하나도 아끼고, 저축하고 열심히 생계를 꾸려나가고 재산을 축적하게되었다.
주위사람들은 나를 평가하기를 이마에 바늘을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나올 놈이라고 하였다.
경제사정은 여의치 않았지만 나름대로 결식아동돕기, 소년소녀가장돕기와 장학금지원에 최선을 다하였다.
지금도 아이들이 굶주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필자의 소신이다.
두 번째 한은 대학졸업장이 없는 것이었다.
나의 진로에 가장 걸림돌이 대학졸업장이었다.
책임있는 일을 맡으려면 꼭 대학졸업장을 요구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괴로움과 특히 신씨대종회 사무장을 뽑는 데도 대학졸업장이 없어 종친회 일을 못한 서러움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 한을 극복하기 위해서 한양대학교 평생교육원 경영과84학점과 신흥보건대학10학점, 건국대학교 사회복지과 42학점을 취득하여 한양대학교 경영학사로 내년에 졸업할 예정이다.
하고 싶은 일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현재 토끼농장 2천평 대지 위에 노인요양원을 세워 노년에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싶다.
둘째는 70세 칠순잔치 겸 자서전 출판기념회를 신축예정인 잠실 롯데빌딩 제일 높은 120층 스카이라운지에서 사랑하는 친지와 필자를 많이 도와주신 분들을 모시고 싶다.
자서전 내용은 필자의 삶을 반성하고, 후세에 교훈이 되는 정치, 경제, 문화 편으로
기록하여 남기고 싶다.
셋째는 끝이 보이지 않는 목장에 토끼와 사슴을 기르며 백마를 타고 한 없이 달리고 싶다.
두서없이 나의 삶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뒤돌아보고 희망의 메시지를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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