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자살에 대해서 -이기춘(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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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기춘 작성일10-01-30 13:56 조회2,718회 댓글0건본문
얼마 전에 모 그룹의 회장이 자살을 했다. 그 분은 D그룹의 총수였기도 한 분이라 H그룹의 모회장이 자살(?)을 했을 때보다 더욱 쇼크가 컸다.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그 분에 대한 불행을 보면서 불행이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도 되었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어떻게 하면 다치고, 어떻게 하면 봉변을 당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경험에 의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것에 대해 믿겠금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렸을 적에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는 단계에서 조마조마하며 살살 걸을 때는 넘어지지 않지만,
그것이 약간 속도가 빨라지면 뒤뚱거리다가 넘어지게 되는 경험으로 말미암아 속도가 지나치게 되면 넘어진다는 믿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갖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든 불교든 천주교든 우리가 종교를 갖게 되는 것은 종교를 통해 불완전한 우리의 심신을 고추세우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없애고자 하는데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배냇교인이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는 믿는 사람을 신자 또는 신도라고 일컫는다.
믿음이라는 말은 사전에서도 '꼭 그렇게 여겨서 의심하지 않다'라는 말로 설명이 되어 있지만, 하나의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 사람과 그 사람에 관련한 다른 부분까지도 믿게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얼마 전에 고 노무현대통령의 국민장이 있었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지낸 분이 설마 자살을 감행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그곳에 우리 국민의 슬픔과 설움이 함께 배어 나왔으리라 생각을 하는 바이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그분이 대통령으로 재직 중일 때, 다른 사람들이 욕을 할 때라도 침묵을 지켜 온 사람 중의 한 사람이고, 한편으로는 학력의 고저를 불문하고 취임 초기 온 일본 국민이 지켜보는 가
운데 질문에 대해 논리 있게 자신의 견해를 당차게 피력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생각을과단성 있게 실행하는 대단한 뱃심에 놀란 적도 있어 그분에 대해 한 편으로는 존경심을 갖고 있던 사람이기도 하다.
장례식에서 서럽게 우는 사람은 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연민에서 그런 슬픔이 배어 나온다는 글을 어딘가에서 읽은 것도 같은데, OECD국가들 중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우리나라, 하루에 평균 34.2명이 자살을 하는 자살공화국에서, 그 나라의 대통령으로 재임 중에는 자살을 방지하는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정책을 펴기도 한 사람이 어떻게 자살을 할 수 있는 것인지 그저 아연할 뿐이다.
고 탤런트 최진실이 자살을 하고 난 다음에, 이번에는 대법원에서 살아있을 때 그녀에게 걸려있던 재판의 결과가 모델로서의 이미지 훼손(살아있을 때의)으로 인하여 광고주에게 손해를 입혔으니 배상을 해야만 한다며 광고주의 손을 들어주는, 그래서 삼십억 원이라고 하는 배상금을 고 최진실은(그 상속인) 배상을 해 주어야만 하는 현실인 것이다.
고인에 대해서는 나도 평소 연기도 연기지만 깜찍하고 밝은 이미지가 우리 국민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준다고 생각해 평소 팬의 한 사람으로 자처하기도 했던 적이 있다.
자살로써 자신에게 관계된 불명예 등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겠는데, 이제는 면피하기 위해, 비전이 없다고 삶이 괴롭다고 자살을 감행하더라도, 결코 당 사자에게 명예롭지만은않게 사건처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명실상부하게 보여준 사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살아서 자신의 걸머진 고통을 풀고 가야,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를 풀고 가야, 그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살은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회피이고 자신을 믿고 있는 타인에의 배신행위이다.
그 사람이 자살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자살을 했을 때, 우리는 슬퍼서 울어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 죄나 잘못된 행위를 방치하고 자살을 함으로써 면피하려고 하는 기만적인 행동에 오히려 질타를 하고 불이익을 주어야만 할 것이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으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하지만 자살은 미워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삶은 저절로 형성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억 겹의 인과관계 속에서의 연으로 인하여 있어야만 할 존재로서의 가치가 매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인들은 정말 자신의 앞길이 순탄치가 않아서 비전이 없기 때문에,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이 되어 자살을 감행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 우리는 안타까움은 느낄지언정 그 사실(자살)에 대해서 미화를 하거나 다른 연유로 인해서 자살로 몰렸다든가 하는 등의 말로 그 자살을 이용하거나 미화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 여배우를 우리는 한 때 국민배우라고 믿으며 사랑했고, 잘했든 못했든 한 때는 우리나라를 5년 동안이나 통치해 나온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리라고는 감히 생각지 못했을 그 점에 그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으며, 그렇기 때문에 또한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믿음을 자살이라는 배신행위로 갚은 사람들에게 용서는 베풀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미화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인 것이다.
소우주인 인간이라지만 부족한 것이 많고, 완벽할 수가 없기 때문에 완벽하고자 노력을 하는 것이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자기자신조차도 완벽하게 믿을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이 사는 세상인 것이다.
이제 고 노무현 전대통령도, 탤런트 최진실의 죽음도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져가는 시점에 다시 믿음과 자살이라는 글로서 그들에 대한 삶의 역할과 자살에 있어서의 영향을 되새겨 보며, 설혹 감옥에서 죄값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 어떤 경우, 상황에서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자살은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총동문회 부회장 겸 편집위원장(5회), 수필가, 우리쌀보내기운동본부장,
우리는 경험적으로 어떻게 하면 다치고, 어떻게 하면 봉변을 당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경험에 의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것에 대해 믿겠금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렸을 적에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는 단계에서 조마조마하며 살살 걸을 때는 넘어지지 않지만,
그것이 약간 속도가 빨라지면 뒤뚱거리다가 넘어지게 되는 경험으로 말미암아 속도가 지나치게 되면 넘어진다는 믿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갖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든 불교든 천주교든 우리가 종교를 갖게 되는 것은 종교를 통해 불완전한 우리의 심신을 고추세우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없애고자 하는데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배냇교인이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는 믿는 사람을 신자 또는 신도라고 일컫는다.
믿음이라는 말은 사전에서도 '꼭 그렇게 여겨서 의심하지 않다'라는 말로 설명이 되어 있지만, 하나의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 사람과 그 사람에 관련한 다른 부분까지도 믿게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얼마 전에 고 노무현대통령의 국민장이 있었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지낸 분이 설마 자살을 감행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그곳에 우리 국민의 슬픔과 설움이 함께 배어 나왔으리라 생각을 하는 바이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그분이 대통령으로 재직 중일 때, 다른 사람들이 욕을 할 때라도 침묵을 지켜 온 사람 중의 한 사람이고, 한편으로는 학력의 고저를 불문하고 취임 초기 온 일본 국민이 지켜보는 가
운데 질문에 대해 논리 있게 자신의 견해를 당차게 피력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생각을과단성 있게 실행하는 대단한 뱃심에 놀란 적도 있어 그분에 대해 한 편으로는 존경심을 갖고 있던 사람이기도 하다.
장례식에서 서럽게 우는 사람은 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연민에서 그런 슬픔이 배어 나온다는 글을 어딘가에서 읽은 것도 같은데, OECD국가들 중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우리나라, 하루에 평균 34.2명이 자살을 하는 자살공화국에서, 그 나라의 대통령으로 재임 중에는 자살을 방지하는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정책을 펴기도 한 사람이 어떻게 자살을 할 수 있는 것인지 그저 아연할 뿐이다.
고 탤런트 최진실이 자살을 하고 난 다음에, 이번에는 대법원에서 살아있을 때 그녀에게 걸려있던 재판의 결과가 모델로서의 이미지 훼손(살아있을 때의)으로 인하여 광고주에게 손해를 입혔으니 배상을 해야만 한다며 광고주의 손을 들어주는, 그래서 삼십억 원이라고 하는 배상금을 고 최진실은(그 상속인) 배상을 해 주어야만 하는 현실인 것이다.
고인에 대해서는 나도 평소 연기도 연기지만 깜찍하고 밝은 이미지가 우리 국민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준다고 생각해 평소 팬의 한 사람으로 자처하기도 했던 적이 있다.
자살로써 자신에게 관계된 불명예 등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겠는데, 이제는 면피하기 위해, 비전이 없다고 삶이 괴롭다고 자살을 감행하더라도, 결코 당 사자에게 명예롭지만은않게 사건처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명실상부하게 보여준 사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살아서 자신의 걸머진 고통을 풀고 가야,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를 풀고 가야, 그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살은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회피이고 자신을 믿고 있는 타인에의 배신행위이다.
그 사람이 자살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자살을 했을 때, 우리는 슬퍼서 울어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 죄나 잘못된 행위를 방치하고 자살을 함으로써 면피하려고 하는 기만적인 행동에 오히려 질타를 하고 불이익을 주어야만 할 것이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으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하지만 자살은 미워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삶은 저절로 형성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억 겹의 인과관계 속에서의 연으로 인하여 있어야만 할 존재로서의 가치가 매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인들은 정말 자신의 앞길이 순탄치가 않아서 비전이 없기 때문에,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이 되어 자살을 감행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 우리는 안타까움은 느낄지언정 그 사실(자살)에 대해서 미화를 하거나 다른 연유로 인해서 자살로 몰렸다든가 하는 등의 말로 그 자살을 이용하거나 미화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 여배우를 우리는 한 때 국민배우라고 믿으며 사랑했고, 잘했든 못했든 한 때는 우리나라를 5년 동안이나 통치해 나온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리라고는 감히 생각지 못했을 그 점에 그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으며, 그렇기 때문에 또한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믿음을 자살이라는 배신행위로 갚은 사람들에게 용서는 베풀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미화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인 것이다.
소우주인 인간이라지만 부족한 것이 많고, 완벽할 수가 없기 때문에 완벽하고자 노력을 하는 것이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자기자신조차도 완벽하게 믿을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이 사는 세상인 것이다.
이제 고 노무현 전대통령도, 탤런트 최진실의 죽음도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져가는 시점에 다시 믿음과 자살이라는 글로서 그들에 대한 삶의 역할과 자살에 있어서의 영향을 되새겨 보며, 설혹 감옥에서 죄값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 어떤 경우, 상황에서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자살은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총동문회 부회장 겸 편집위원장(5회), 수필가, 우리쌀보내기운동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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